언제인가 부터 저의 일상은 별로 즐거움도 없고 늘 똑같은 하루하루가 아니라 불안속에 살아가야 하는 하루하루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떠나 방황하던 20년이라는 긴 새월 속에서도 내힘으로 잘살고 내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잘 이룬것이라 생각 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속에서 언제나 불안과 불평이 가득한 일상들을 보냈고 누군가의 충고는 날 비난하는것 같은 생각에 적대시 하며 화를내는 것이 당연한 저의 모습이였습니다
몇년전 주님을 다시 만나고 예배하면서 오히려 물질적으로 않좋아 지는 내가 이룬것들이 다 빠져 나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신기하게 마음은 평안해지고 힘은 들지만 하루를 살아갈수 있게 힘주시는 주님을 더욱 경험 하고 있는 요즘 입니다.
이번 특새로 한발짝 더 나아갈수 있는 힘과 믿음을 주셨고
앞으로 내가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하나 하나 만들어 주실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주셨습니다.
불만과 불평만이 가득했던 일상을
감사로 바꾸어 주시고 하루를 살아갈 힘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작년까지는 특새를 할때마다 무언가 특별한 은혜를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유독 특별한 은혜가 저의 마음 속에는 찾아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매일매일 평범한 일상이 특새기간에도 어김없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어린 두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매일 육아에 살림에 일까지 하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 특새기간에도 여전히 이어졌습니다.
블럭놀이를 하는데 서로 싸우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전의 저라면 "그럴거면 블럭 다 버리자!! 버리자 버려 !" 라고 화를 내야 하는데, 차분한 목소리로 아이들의 감정도 읽고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연이은 새벽기상으로 화낼 기력이 없는건지.. 유독 잠잠하게 지낸 특새였지만 일상에서도 늘 감사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겠노라 기도하며 결단한 덕분인지..🤣
아이들의 싸움 소리와 울음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저의 모습에 스스로 신기하다 생각하며 은혜 나눔을 적어봅니다.
예전에는 특새기간동안 다른 성도분들께서 울며 목놓아 기도할때 분위기에 휩쓸려 울기에만 바빴지만 올해는 그저 잠잠하게 주를 바라보며 매일 결단하며 마음과 머리로 주님을 더욱 알아가게 하셨습니다.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이지만 더욱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이번 특새가 저에게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특새 첫날 아침 7시.
두 아이가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특새가야 하는데 왜 깨우지 않았냐는 아이들의 원망 섞인 말에 아내는 피곤해서 못 일어났다며 내일부터 가자고 아이들을 달래느라 쩔쩔매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난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흰 교회가서 담임 목사님 설교는 어려워서 알아듣기 어렵다고하고 설교내내 졸면서 왜 교회에 가고 싶어 하냐고...
아이의 대답이 의외였다.
"교회가 편해"
아이가 대답한 편하다는 말이 친구가 많고 놀꺼리가 많아 편한 것도 있을 것이고, 어른들이 다들 자신을 이뻐하니까 펀하다는 뜻도 있을 것이지만 나에겐,
교회가 참 평안하고, 자유하고, 행복하다로 들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에게 교회란 그런 곳이다.
언제가도 평안함을 느끼며 밤늦게 까지 봉사할 수 있는 곳,
나의 모자른 부분과 얕은 신앙의 깊이를 자유하게 들어내도 되는 곳,
10년 이상씩 차이나는 다락방 집사님들과 나누는 교제 속에서 남자들의 숨겨진 수다본능을 행복하게 누려도 되는 곳.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가 고단한 황야길에서 나에게 주신 또 하나의 기적같은 일일 것이다.
이런 기적같은 매일매일을 감사하며 살아내는 것이 나의 출애굽기가 아닐까 싶다.
요즘 사람들은 SNS에 중독되어 뇌가 도파민에 익숙해지고, 더 많은 도파민을 얻기 위해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아 더 많은 SNS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자극적인 것을 쫓고 그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성취감과 만족감은, 이후에 찾아오는 허무함과 공허함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고 합니다.
혹시 저도 은혜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이런 감정적 자극을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인생의 광야 같은 힘든 길을 걸어오다가 이제서야 안정이라는 것이 나에게도 찾아오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드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고난과 힘듦이 사라지다 보니 간절함이 줄어들고, 오늘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예전만큼 뜨겁게 기도하려면 제법 많은 노력과 집중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또다시 뜨거워지려면? 눈물흘리며 기도하려면? 뭘 더 해야하지? 라며 행동에 집중하는 함정에 잠시 빠지기도 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저의 모든 찬양은 변함없지만, 뜨거움과 간절한 느낌, 특히 눈물이 줄어들다 보니 내가 변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듭니다. 또 한편으로는, 매일 같은 내용으로 그렇게 감정이 요동치는 것이 오히려 병이 아니겠는가 하며 스스로 위로해 보기도 했었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고난 중에 살려달라고 기도하며 울부짖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힘들면 자연스럽게 간절해지고 자연스럽게 눈물이 나며, 기도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워지지만, 그 상황을 벗어나면 이전에 자동으로 되었던 부분을 이제는 나의 노력으로 채워나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은혜, 그리고 나의 몫
예수님께서도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해 주시며,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감싸주시는 위로자이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른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행동에 대해 엄하게 꾸짖고 가르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흔히 학교에서의 호랑이 선생님과 같은 모습이 예수님에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나의 삶에도 이러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나 어느 정도 성장했으니, 이제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나씩 해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미 은혜받은 자들에게는 그들에게 주어진 몫을 요구하심을 새벽예배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지, 고난 중의 간절함과 눈물로 기도하던 감정이 없다고 불안해하지 않고, 감정적 도파민을 쫓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당하고 인내하며 해야 할 일을 잘 해내는 것,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의 입장에서 둘째와 아버지를 보며 시기, 질투, 부러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삶이 진짜 내 삶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 결코 쉽지 않은 길인 것 같습니다.
고난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며 고난을 두려워했던 그때보다 지금이 더 두렵고 떨립니다. 한 줄기 빛을 쫓아가던 시절보다, 온갖 유혹의 길, 수많은 길 중에서 좁고 작은 하나의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한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완성할 자신이 없기에 성령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이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목적지까지 잘 도착하길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합니다.
새벽예배에서 눈물 한바가지를 쏟고
은혜충만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힘으로 기쁨으로 오늘하루를 살아낼수있을것같았습니다.
두아이 등교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는 순간 “엄마..나 숙제를 깜빡하고 안했네..”
새힘과 기쁨은 온데간데 없고 깊은곳에서 부터 화가 올라왔습니다.
나의 충만한 은혜를 단1초만에 사라지게 만드는 너가 진정 나의 시험인가. 사단인가.
결국 아이를 눈물쏙빼게 혼내고 등교시킨후, 왜 특새기간에 꼭 이렇게 폭팔하게 하시는지,
집에오면 어짜피 제자리인 상황과 제삶에 불평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간 다음날 새벽예배
홍해를 건넌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들으며
은혜의 event 뒤 따라오는것은 나의몫이라는 걸 알려주셨고 그순간 눈물이 하여없이 흘렀습니다.
결국 나도 불평불만쟁이였구나..
모태신앙이라고 자부했던내가
한탕주의의 신앙을 가지고있구나.
저의 부끄러운부족함을 마주했습니다.
이제는 한층더 성숙해 나의계획이 아닌 그분의 계획아래 나의몫까지 찾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되길 소망합니다.
매일새벽 뜨거운말씀에 사연있는 사람처럼 눈이퉁퉁부어있지만
순간순간주시는 은혜에 그저 감사할뿐입니다. 하나님께 더 순종하고싶어졌습니다. 더 깊게 사랑하고싶어졌습니다.
마지막날까지 나의고백이 하나님께 닿길 소망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보내느라 몸이 고단하지만, 막상 자려고 누워도 잠들기 어려워 뒤척이는 요즘이었습니다. 그래도 잠을 청해보려고 시편 42편 5절("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을 마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복해서 외우다가 겨우 잠이 듭니다. 오늘은 새벽의 은혜를 조심스레 남겨볼 마음을 내어봅니다. 지금은 마음이 어제보다 편안합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과 필요한 시간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어제보다 한결 평안해진 마음을 느낍니다. 마침 오전에는 풀어야 했던 문제의 실타래 중 하나의 끝이 해결되어 한 숨도 돌릴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유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 자신을 위해 잊지 않고 간직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남겨봅니다. 막상 쓰려니 누구에게 설명하듯 써지는게 어색해서, 그저 새벽에 나누었던 기도를 떠올리며 정리해서 옮겨봅니다.
--------------------------------------
주님, 저의 기도의 초점이 바뀌어야 함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뒤에 있는 것, 뒤를 쫓아오는 것(출14:10)'을 해결하기 위한 기도를 멈추기 원합니다. 뒤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으라(14)'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뒤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부르짖을 필요도 없다(15)'고 하시며, 그저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15)'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 뒤를 쫓아오는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제가 나아갈 길, 저에게 맡겨주신 일, 저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돌보는 일에 소홀히 했고, '이렇게 힘들 때는 그래도 된다'고, '어쩔 수 없다'고 '모든 게 안정되면 그때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합리화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주님, 용서해주세요. 저의 연약함과 무지와 죄악된 본성을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세요.
뒤에 있는 것들은 주님께 맡겨두고, 앞을 바라봅니다. 갈라져야 하는 홍해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기적처럼 갈라지고 열려야 하는 것은 나였음을 고백합니다. 바로보다 완고하고 완악하게, 홍해보다 크고 거대하게, '주의 길을 가로 막고 있는 나'를 봅니다. 엘리사의 사환의 눈을 여셨던 것처럼, 홍해 같이 크고 완악한 제 눈을 열어주세요(왕하6:17). 그리하여 이미 당도한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하시고, '그저 발을 딛어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마른 땅'을 '밤새도록' 만드신 주님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을 보게해주세요.
뒤에 있는 문제들이 제 기도 제목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여정이 제 기도 제목임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뒤를 쫓아오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제 일이 아니라, 제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돌보고 잃지 않는 것이 제 과제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하나도 잃지 않았다(요17:12)'고 하셨던 주님의 기도가 제 소원으로 다가옵니다. 주님, 저도 이 시간들을 지나고, 마지막 때에, 제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제들과 씨름하는 것에만 힘과 세월을 허비하지 않기 원합니다.
제가 의지하던 '병거와 군대와 지휘관들'을 '물 속'에 던져 버리신 주님(출15:4). '다른 이들을 따라잡고, 욕망을 채우고, 이기고 성공해보겠다(5)'고 호언장담하는 허망한 말들을 '바람'으로 흩어버리신 주님(9-10). 이제 크고 거대한 줄 알았던 것들이 휩쓸려 나간 제 삶의 자리에서, 제가 부를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제 삶을 통해 노래되어야 할 당신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전히 '제 영혼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고, 당신의 얼굴을 언제 뵐 수 있을까(시42:2)' 고대합니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는, 지금의 이 시간들이 간증이 되고, 은혜의 흔적으로 제가 부르는 삶의 노래가 되어 있을 날들을 그려봅니다. 이 소망을 제게 두신 분이 주님이시며, 그 일을 완성해가실 것임을 신뢰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